Chapter 20 I REMEMBER WHEN

Chapter 20 I REMEMBER WHEN
그때가 기억나네
제가 오늘 밤 말씀드린 것을 가슴 깊이 간직하시어, 이 시저의 세상에서 마음을 다해 시험해보십시오. 여러분 창조의 권능에는 어떤 한계도 없습니다. 기존의 믿음이 아닌 새로운 믿음을 세우시고 그 위에 확고히 서세요. 그리고 “그때가 생각나네”라고 현재의 세상을 과거의 상태로 만드십시오.
그리고 지금 바깥세상에서 보이는 것, 그 자리에
여러분 마음의 눈으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보세요.
하나님의 창조의 힘에 관련해서 위대한 계시가 내려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면 저는 혼자만 간직할 수는 없고 제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과 항상 나누어야만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수년 전에 제가 받았던 계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뉴욕의 한 웅장한 저택의 내부에 영의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곳은 20세기 초, 금융 거물들이 살던 바로 그런 집이었습니다. 저는 완전히 정신이 깬 채로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상태였는데 세 세대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할아버지는 이곳이 아무것도 지어지지 않았던 빈 공터였을 때 그곳에 서서는 ‘난 이 땅이 빈 공터였을 때가 가끔 생각난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꿈을 이미 현실인 것처럼 말하셨는데 그걸 듣는 사람들은 마치 그 건물이 지금 지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시곤 했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부를 일구신 분이 바로 너희 할아버지셨어.”
저는 깨어서 그 경험을 적은 후에 이내 다시 잠에 들고, 또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바로 그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곳이 빈 공터였던 때가 기억납니다.”
그리고 저는 그곳에 세워질 빌딩을 생생히 그려봤습니다. 그러자 돌들이 제가 마음에서 보고 있는 것에 맞춰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이 원리는 건설적인 목적에도 쓰일 수 있지만 또 파괴적인 방법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위용을 자랑하는 큰 빌딩 앞에 서서, 한때 찬란한 빌딩이 섰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된 잔해들만 있는 것을 상상하면서 “이곳에 아주 멋진 빌딩이 있었던 때가 생각나네. 그런데 지금 이 꼴을 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이 땅이 한때 빈 공터였을 때가 기억나”라고 말하면서 아주 멋진 건물을 상상할 수도 있겠죠. 전자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이 원리를 이용한 것이고, 후자는 건설적인 방법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또 친구를 생각하면서 “지금은 저렇게 부자가 되었지만 한때는 내 친구가 빈털터리였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가 기억나네”라고 말할 수도 있고, 아니면 반대로 “한때는 참 가진 게 많은 친구였는데 지금은 이리 가난하게 되었네”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그녀가 예전에 참 건강했던 때가 기억나네”라고 말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녀가 아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명이던 때가 기억나네”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지금은 유명해졌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제가 꿈속에서 받은 계시가 어떤 힘을 나타내고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상상력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또한 이 힘을 활용할 것인지 여부도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여러분이 그 결정을 하십시오. 그리고 또 세상에 일어나는 결과에 대해서 여러분이 책임지십시오.
민수기 12장을 보면, “너희 중에 예언자가 있다면 나, 여호와가 그의 환상 속에 나를 드러낼 것이요, 꿈속에서 그에게 말하리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에 나온 예언자는 미래를 점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이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제게 제가 예언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수정 구슬이나 찻잔에 떨어진 잎들이나 아니면 카드나 천문을 보면서 미래를 점치는 예언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성서를 성취했습니다. 저는 성서의 주인공인 “아버지”가 바로 저임을 압니다. 저는 성서를 이루고, 창조의 힘에 관련해서 제가 받은 계시들과 경험들을 나누고자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 꿈을 통해 창조의 힘을 “그때가 기억나네(Remember when)”라는 간단한 공식으로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나의 현재 모습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면 지금 당장 내가 부유하다는 느낌과 함께 이렇게 말하세요.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때가 생각나네.”
이 말은 나는 이제 더 이상 가난과는 상관없다는 뜻이 아닌가요? 또 같은 식으로 “나도 무명이었던 때가 생각나네” 혹은 “책 한 권도 안 팔리던 때가 생각나네”라고 말해보세요. “~할 때가 생각나네”라는 문장의 빈칸에 여러분의 소망과 성취를 사건으로 적어보십시오. “나는 그때가 기억나네.” 이 말은 우리의 한때의 기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환상에서 저는 아들의 기억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환상에서는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빈 공터에 서서 지금은 마치 그렇지 않은 듯 공터였던 때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자 건물들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꿈을 두 번에 걸쳐서 꾸게 되었는데, 창세기 41장에서는 “꿈을 겹쳐서 꾼 것은, 주에 의해 정해진 일이니 그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억은 우리의 경이로운 상상력이며, 만물의 근원이며,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라 말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창조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다시 올 거라고 말한다면 혹시 믿고 계신가요? 절대 그 말에 동의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올 거라고 생각한다면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잊으셨나요?
보라,
심지어 세상이 끝날 때조차도 나는 언제나 그대와 함께 있노라.
성경을 믿는다면 어떻게 그분이 언젠가 떠났던 것처럼 생각하면서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가 하늘나라의 왕국(내부)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올 때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하나님의 창조의 권능)가 여러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가 외부에서 찾아올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상상력과 우리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상상력처럼 우리를 한 번도 떠났던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는 오실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 외부 세상 어딘가에서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의 내용입니다. 유의해서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되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그 누구에게도 속박된 적이 없습니다.” 이에 그리스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죄를 지은 자는 죄의 노예더라.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어떤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배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죄란, 우리가 움직이는 것(move: 정신적으로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가는 것)을 실패해서 우리가 목표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오늘 밤, 여러분이 더 이상 표현하고 싶지 않은 상태 속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다면 반드시 원하는 상태로 움직이는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만약 정신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계속해서 원하지도 않는 상태 속에 머물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삶의 목표에서 빗나가는 것(missing your mark in life: 죄의 본래 뜻), 즉 죄를 짓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소원을 갖고 있나요? 그것이 무엇이더라도 그 소망이 성취된 느낌을 고집하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느낌은 믿음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한 번도 속박을 알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예수 그리스도는 말합니다. “만약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면 그때 너희는 진정으로 자유로우리라.” 이것은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다윗을 여러분의 아들로 인식했을 때에만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영(그리스도라 불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은 심연의 위에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움직임이라는 것은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인 위치의 변화가 있지 않다면 감지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대상이 움직였음을 알기 위해서는 고정된 기준점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정신적으로 움직이는 것에도 고정된 기준점이 필요합니다. 나약하고 병든 자(과거 모습)를 우리의 고정 기준점으로 삼아서 우리의 마음 안에서 강하고 건강한 자를 보면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이 나약하고 병들었던 때가 기억나네. 근데 지금 그의 모습을 봐봐!”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그 나약했던 모습을 기준점으로 해서 정신적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지금 거울을 보세요. 그리고 지금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건강함과 행복의 기운을 가득 발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속삭이세요.
“한때 내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지.”
그곳에 새롭게 비춰진 모습을 계속 보신다면 그 상태에 생명을 주어 부활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상, 즉 우리 자신에 대한 관념이나 다른 이들에 대한 관념은 하나님이자 그리스도인 우리의 경이로운 상상력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창조의 권능인 그리스도는 같은 존재이기에 결코 우리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결코 떠난 적이 없기에, 오늘 밤 우리가 잠에 들어 아름다운 꿈을 꾸든 혐오스러운 꿈을 꾸든 그리스도는 그것들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면 그리스도(우리의 상상력) 역시 우리와 함께 일어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꿈을 기억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상상력은 세상의 창조적인 권능이기에 인간의 상상력은 세상 모든 것들이 마땅히 경외해야 하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은 이 경이로운 상상력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세상 전체가 여러분의 자아가 바깥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난밤, 저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친구들을 방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형처럼 이 땅에서 사람들이 ‘죽음’이라 부르는 작은 문을 통과해 건너간 이들도 찾아갔습니다. 제게는 지난밤 방문했던 그 세상 역시 지금 이 세상과 똑같은 실체입니다. 제 친구들은 이 땅을 떠났지만 그들이 이곳에 있는 동안 겪었던 경험들과 같은, 미움, 애정, 사랑, 혐오 등을 똑같이 겪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젊어졌을 뿐, 이 땅에 살던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똑같은 문제를 여전히 안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이미 죽었다는 것(다시 태어남)을 완전히 인식하기에 이 땅에서 보이는 것을 닫고 즉각적으로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곳은 이 땅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현실이 아닌 듯 보이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에게는 분명한 실체입니다. 저는 지난밤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자, 요한복음 14장을 보겠습니다. 성서의 주인공이 성서를 성취하기 시작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가, ‘나는 지금 떠난다. 그리고 다시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라고 말한 것을 들었느니라.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보다 위대한 아버지에게 나는 가는 것이기에, 너희는 이 이야기를 듣고 기뻐했을 것이니, 이는 아버지가 나보다 크심이라.
여러분에게는 이 말씀이 모순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밤 청중 중에는 제가 이 말을 했던 세 사람이 있었고, 그 이야기를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성취한 분들입니다.
이제 저는 여기 계신 모두에게 말합니다. 제가 떠나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올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를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영혼 깊은 곳에서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제가 여러분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저는 결코 여러분을 떠나지 않을 것임을 여러분은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계(視界)에서 사라지면서 그리스도는 여러분이 되었기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여러분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했듯이 “I AM”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내 안에 살고 있고, 나는 여러분 안에 살고 있고, 여러분은 내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나를 찾을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아버지로서 찾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존재의 하나 됨이고 이것 외의 길은 없습니다.
제가 오늘 밤 말씀드린 것을 가슴 깊이 간직하시어, 이 시저의 세상에서 마음을 다해 시험해 보십시오. 여러분 창조의 권능에는 어떤 한계도 없습니다. 기존의 믿음이 아닌 새로운 믿음을 세우시고 그 위에 확고히 서세요. 그리고 “그때가 기억나네”라고 현재의 세상을 과거의 상태로 만드십시오. 그리고 지금 바깥 세상에서 보이는 것, 그 자리에 여러분 마음의 눈으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보세요.
여러분이 주위를 사랑스러운 것으로 채우든, 혐오스러운 것으로 채우든, 둘 다 같은 권능과 같은 방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 마음을 사랑스러운 것으로 채웠으면 합니다. 우리의 상상력은 타인의 사업을 무너뜨리게끔 사용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고의는 아니더라도 이런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같습니다.
수년 전에 바베이도스에서 저는 형에게 사업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형은 어떤 악의도 없이, “아주 잘 되고 있어. 이 공장의 3분의 2 지분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주 좋은 관리자야.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의 근무시간이 길어서 굉장히 지칠 수 있을 것 같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그 남자는 형에게 지금 자신의 근무시간이 매우 길고 책임감도 너무 막중해서 자신의 지분을 인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일을 만든 것은 바로 형입니다. 그 남자는 나가고 싶어 했기에 형은 그가 제시한 가격으로 지분을 인수했습니다. 빅터 형은 이전에도 이런 일들을 여러 번 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계시를 받아서 이 진리를 알았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형에게 가르쳐준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50에이커의 개발되지 않은 땅을 보면서 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빅터, 이곳은 집과 호텔을 짓기에 아주 적당한 땅이구나.” 그 땅은 세 자매들의 소유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팔 의향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 땅을 팔 상황이 닥쳤는데 그 땅을 계속해서 원했던 사람은 아쉽게도 브라질에 있어서 그 사람이 아닌 아버지가 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표현한 생각은 어쩌면 아무런 힘도 없는 듯 보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은 단지 한 순간의 강렬함만 있어도 생명을 얻습니다. 약한 불 위에 올려놓은 물주전자는 끓지 못하지만 그 불꽃이 강렬하게 되는 순간, 그 물은 확실히 끓게 됩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 할아버지가 되었던 꿈에서, 저는 듣던 사람들이 완전히 현실과 같이 느낄 정도로 아주 생생하게 느낄 정도로 명확하게 묘사를 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여러분이 더 이상 지금의 모습으로 살고 싶지 않다면 그 상태에서 이동해야 합니다. “내가 싫어하던 상태에 있었던 때가 생각나네”라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 상태 대신에 새로운 상태를 현재의 객관적 현실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새로운 인식에 믿음을 계속 유지한다면 그 믿음은 결정화될 것입니다. 그렇게 결정화되는 동안, 소망으로 이끄는 수많은 사건의 다리들을 건너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일들이 일어나게 될지는 저 역시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그 결과는 반드시 펼쳐진다는 사실뿐입니다.
바로 지금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의 친구가 건강한 것을 인식하면서 그가 건강하지 못했던 때를 과거의 기억으로 여기세요. 여러분의 딸이 미혼인 상태로 혼기를 놓치고 있다면 이미 결혼한 것을 상상하면서 지금의 현실을 과거로 기억하세요. “그때가 생각나네”라는 기법을 사용해, 여러분의 인생을 새롭게 창조하길 바랍니다.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지 않으신가요?
“지가 뭐라도 된 줄 아나 보지? 난 걔가 땡전 한 푼 없을 때, 별 볼일 없던 때를 기억한다고!”
이 말속에서 질투의 감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투는 그 말에 힘을 더해줍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질투의 대상에게 더 많은 것을 갖게 해줍니다. 그 사람은 아마 자신의 성공이 누구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그 생생한 기억의 방법이 성공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제가 수년 전에 경험했던 비전은 두 번에 겹쳐서 보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구절처럼 그것은 사실임을 말해주는 것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원리를 보여줬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사용해 봤으면 합니다. 여러분의 현재 모습과 원하는 것을 비교해 봐서 만약 이 둘이 다르다면 여러분은 정신적으로 그 원하는 상태를 향해 움직여야만 합니다. 움직임의 비밀을 배우십시오.
수년 전 제 친구의 비전 속에서 저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제가 여기에 얼마나 오래 있었죠?” 제가 “2년”이라고 대답했을 때, 그는 “제가 배운 게 무엇인가요?”라고 물었고, 이에 제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네, 당신은 이동의 방법을 배웠습니다.”
여러분이 정신적인 현 위치에서 원하는 위치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기준점을 가져야만 하는데 기억이 바로 그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친구는 여러분을 가난하고 유명하지 않은 사람으로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친구들이 여러분을 더 이상 그렇게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여러분이 바뀌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임으로써 여러분은 과거의 기억에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준점을 통해 친구들의 얼굴에 나타난 변화된 표정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좋아하는 친구라면 그 기쁨을 같이 느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친구라면 질투 어린 마음을 나타낼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변화에 대해 친구의 질투를 보게 되더라도 그걸 변화시키려 하지 마세요. 다른 이의 질투는 여러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저항력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저항력이 없다면 움직일 수가 없고 심지어 제가 이 연단을 떠나는 것도 저항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차가 움직이는 데에도 저항이 없이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만약 어떤 누군가가 질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면 그냥 놔두시고 단지 담대하게 여러분이 진정 원하는 모습이라는 것만을 사실로 받아들이세요. 여러분이 같은 방법으로 친구들을 이용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볼 때는 지금과는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새로운 모습의 나를 보고는 내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대화 나누는 것을 듣고 그들의 얼굴을 보세요!
이것은 하나님이 환상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자신을 드러냈을 때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언어가 꿈과 환상이란 것을 안다면 이 세상에서 꿈이나 환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습니까? 불멸하는 창조의 원리를 알려주는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주어지는 계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TV 프로그램이나 영화, 혹은 라디오나 신문기사가 계시보다 중요할까요? 그것과 견줄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 밤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길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더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여러분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가 이 땅에 다시 올 것이라는 말에 동조하지 마세요. 그리스도는 여러분 안에 있는, 여러분의 경이로운 상상력 속에 십자가에 못 박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의 몸, 하나의 영, 하나의 주, 모든 이의 하나님이자 아버지이신 그분 안으로 우리를 다시 모으면, 우리는 모두 내면에서 결국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육체적인 문제, 감정적인 문제들을 겪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밤 한 친구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물을 가져오는 일이 쉬울 것이라고 약속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것이 쉬울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매우 큰 어려움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6장을 기억하면서 절대 낙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산고에 있는 여인은 고통스러워하나,
아이가 태어났을 때 새 생명이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인해
모든 고통들을 잊게 된다.
여러분은 반드시 그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태어날 아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인,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법칙”으로 약속드리는 것은, 모든 물질적인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완벽한 구원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생의 강풍을 완화해 줄 것입니다. 다양한 일들은 계속 일어나고 있으며, 여러분은 다양한 종류의 도전들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이라도 이미 그것을 가졌다고 믿으면 그렇게 되리라”는 법칙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법칙이고, 결코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의 힘에는 결코 한계가 없습니다. 이렇게 계시된 하나님의 법칙을 언제,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전적으로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은 블레이크가 그의 시 「마음의 여행자」에서 말했던 것처럼, 기쁨의 태어남, 하나님의 태어남이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물을 마음에 품게 될 것이고 결국 삶으로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나는 인간들이 살고 있는 땅을 두루 돌아다녔네.
그 땅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살고 있는 곳.
그곳에서 끔찍한 것들을 보고 들었지.
차가운 땅의 방랑자도 좀처럼 알지 못했던 것들을.
그곳에 끔찍한 비명 속에서 생긴 아이가
기쁨 속에서 태어나고 있었네.
마치 사무치는 눈물 속에서 뿌렸던 것의 결실을
기쁨 속에서 받는 것처럼.
블레이크는 정신적인 여행을 하며 보았던 것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이 시는 마지막에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마무리됩니다.
모든 것은 내가 말한 대로 이루어졌네.
여기에서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모든 이들이 예언된 것처럼 성서를 경험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이고, 내부로부터의 태어남이고, 아들 다윗을 찾는 것이며, 하늘나라로의 승천, 그리고 비둘기의 내려옴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운명이며, 여러분의 기억이 회복되었을 때 경험하게 될 여러분의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밤 말씀드렸던 것을 잊지 마세요. 그 진리는 제 영혼 깊은 곳인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가 모습을 나타낼 때 우리는 그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기에 그를 알아보고, 그가 우리 안에서 깨어날 때 모든 만물이 내부로부터 세상에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로써 불가능을 보던 시야는 사라집니다.
다음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본다면 아버지가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왔더라.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내면에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안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내부로부터”라는 말과 “위로부터”라는 말은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라는 말과 “아래로부터”라는 말도 성서에서는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나는 내부로부터 왔지만 그것을 잊은 채, 외부 세상이 나에게 힘을 행사한다고 생각하고, 타인이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착각합니다. 이제 나는 나에게 힘을 행사하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고자 합니다.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바로 내부로 돌아가면 됩니다. 내부에는 오직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겠습니까?
여러분이 삶의 모든 원천인 근원으로 돌아갈 때, 여러분과 제가 하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아버지와 하나의 아들이 있기에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여러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기억은 되돌아옵니다. 또한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이기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으며, 나는 여러분 안에 있고, 여러분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이 진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침묵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